진주를 탐하다 – 까꼬실생태탐방로

Vol.06 2024 Autumn

진주를 탐하다

까꼬실마을의 기억을 걷다

백두대간의 마지막이자 시작점인 까꼬실 마을,
수몰 실향민 정일근 씨와 함께 물속에 담긴 추억 위를 걸었다.

여행을 연출하는 사람, 고재열 여행감독 | 청둑 선착장과 꽃동실, 귀곡초 가는 길 사이사이에 자리한 까꼬실 탐방로를 차례로 거닐었다.

까꼬실마을은 백두대간 마지막 마을이다. 백두대간 완주를 위해서는 꼭 걸어야 하는 마지막 마을이면서, 동시에 새롭게 백두대간 도보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방점을 찍어야 하는 마을이다. 진양호 호반 중간의 봉긋한 언덕 위에 있는 꽃동실 전망대가 바로 그 지점이다.

백두대간의 끝점이자 시작점,
까꼬실마을

까꼬실마을은 백두대간 마지막 마을이다. 백두대간 완주를 위해서는 꼭 걸어야 하는 마지막 마을이면서, 동시에 새롭게
백두대간 도보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방점을 찍어야 하는 마을이다. 진양호 호반 중간의 봉긋한 언덕 위에 있는
꽃동실 전망대가 바로 그 지점이다.

까꼬실마을에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개 넘어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2km 남짓한 길을 걸어서
마을 어귀의 고개를 넘어오는 방법이다.
백두대간 종주 도보 여행을 위해 찾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이 방법으로 마을에 들어간다.

다른 하나는 진양댐 옆 선착장에서 ‘귀곡호’를 타고 진양호를 가로질러 들어오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사정상 승선 자격이 있는 사람만 탈 수 있다. 승선 자격은 수몰댐의 실향민이어만 한다.
고향을 잃은 그들에 대한 조그만 배려 차원에서 무료로 운항하는 것이다.

넉넉한 진양호,
그 안에 담긴 깊고 푸른 시간 속으로

실향민 정일근 씨의 안내를 받아 귀곡호에 몸을 실어 까꼬실마을에 들어갔다. 배가 진양호 위를 지날 때 정 씨는 물에 잠긴 옛적 마을 위치를 하나하나 짚어 주며
설명을 이어갔다. 하선을 위해 배가 접안한 곳은 그가 옛날 자신의 집 위치라고 말한 곳을 바로 지난 지점이었다.

이 마을 출신 작곡가 정민섭은 귀곡호를 모티브로 <고향으로 가는 배>라는 곡을 작곡했다. 그전까지는 그다지 유명세를 타지 못했던 노래였지만 임영웅이 경연 프로그램인 <미스터트롯> 파이널에서 이 노래를 부르고 트로트 가수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아 왕좌에 등극하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고향으로 가는 배 꿈을 실은 작은 배
꿈을 잃은 사람아 고향으로 갑시다
산과 산이 마주쳐 소곤대는 남촌에
아침 햇살 다정히 풀잎마다 반기니
고향으로 가는 배 꿈을 실은 작은 배
정을 잃은 사람아 고향으로 갑시다

– 마을 출신 작곡가 정민섭 고향으로 가는 배 中
(작사 김진경)

실향민의 마음으로
농부의 걸음으로

까꼬실마을은 농사가 잘되던 고장으로 덕천강과 경호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자리 잡아 두 강의 퇴적물 덕분에 땅이 비옥했다. 그 비옥한 땅을 기억하는
실향민들이 텃밭 농사를 짓고 있어 이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귀곡호는 아침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하루에 네 번씩 운항하고 있다.

정겨운 마을 표지가 나그네를 반기는 곳,
까고실마을

– 도보 여행을 위해 까꼬실 마을을 찾는 등산객들

등산객들은 도보 여행을 위해 까꼬실 마을을 찾는다.
우리도 백두대간의 끝점이면서 시작점인 꽃동실 전망대에서 진양호를 조망한 뒤에 까꼬실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갓골, 까장골, 큰샘, 큰말 등등 정겨운 마을 표지가 나그네를 반겼다.

길에 담긴
지나간 시절의 사연

서당이 있었던 서재골, 고구마 농사가 잘되었던 녹두점, 당산이 있었던 먼당. 톳재비 고개에는 애기 무덤이 많았다고 했다.
길에 담긴 지나간 시절의 사연을 듣다 보니 걷는 이를 깊은 정한의 상념에 빠지게 했다.

자연에 마음 내려놓고
지켜나가던 땅

정문부 장군의 후손들이 자리를 잡은 충의사 터 인근에는 선비의 나무로 알려진 배롱나무가 많다.
해주 정씨, 그의 후손들은 모함으로 생을 마감하며 “절대로 벼슬하지 말라”는 정 장군의 유훈을 받들어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햇살 아래 초록빛으로 가득한 여름,
나에게 몰입하는 시간

주인들이 떠나자 더욱 울창해진 왕골 대숲은 이제 까꼬실마을의 자랑이 되었다. 마치 두 팔을 벌리고 반기는 것처럼 길 양쪽에 쭉 뻗은 대숲 사이로 난 산책로가
목가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 대숲 사이사이에 이곳이 사람이 살았던 곳이었음을 증명하는 유실수가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추억을 마주하며
사유하는 곳, 까꼬실

어느 시골 마을에서나 그러한 것처럼 귀곡초등학교도 마을에서 가장 양지바른 곳에 기부채납을 받아 지어졌었다. 그 귀곡초등학교 부지가 까꼬실마을 산책로의
끝부분에 위치한다. 귀곡초등학교의 역사는 1698년 가곡 서당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곡 서당은 1857년에 각후재로 바뀌었고, 1940년에는 나동초등학교
간이 학교로, 1948년에는 귀곡초등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었다.

사람들이 떠났던 자리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다양한 사업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졸업생들의 망향가를 적은 푯말을 읽으며 복도를 지나듯 산책로를
걸었다. 1회부터 빠짐없이 전시된 귀곡초등학교 졸업생들의 단체 사진은 지나간 시간을 붙들고 있었다. 16회 졸업생 단체 사진에서 앳된 모습의 어릴적
정 씨도 찾을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을 내려놓는
실향민들의 안식처

매년 10월 ‘실향민의 날’이 되면 살길을 찾아 이곳을 떠났던 사람들은 나이 들어 노구를 이끌고 까꼬실마을을 찾는다.
실향민이 1,500여 명 정도인데 실향민의 날 행사에 아직도 300명 정도가 참석한다고 한다. 속절없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이제는 약속 없이도 단단히 뭉친다.

귀곡초등학교 부지 뒤쪽에 귀곡호 접안 지점이 있었다.
배를 타러 나가는 길에 물에 잠긴 고사목을 두루 살펴보았다. 이전에는 마을 길의 이정표 역할을 했었겠지만 이제는 뱃길을 밝히는 표지이다.
까꼬실마을을 걷는다는 것은 물속에 잠긴 수몰민의 추억과 함께하는 일이다. 호수의 고사목은 그 애잔함의 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