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를 맛보다 – 내림음식 찜국

Vol.06 2024 Autumn

진주를 맛보다

진주 허씨 집안 ‘내림음식’ 찜국 한 그릇에 담긴 나눔을 보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맛’이 있다. 바로 ‘음식’에 얽힌 이야기다.
오래전 역사를 엿볼 수 있는 한 그릇의 우주에 담긴 이야기, 과연, 우리 곁에는 어디에 있을까?

선조들의 삶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내림음식, 찜국

진주에서 가장 동쪽 끝을 향해 달리면 부자마을로 잘 알려진 ‘지수면’이 나온다. ‘지수’라는 지명에 걸맞게 지혜로운 물이 흐르는 이곳 승산마을. 남강의 지천인 ‘염창강’은 언제나 푸르다. 잠시 눈을 들어 마을을 살피면 연초록 빛깔의 논이 바람에 따라 출렁이고, 제법 여문 볍씨가 차례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의로운 부잣집’이라 불리는
승산마을의 효주 허만정 고택

‘의로운 부잣집’이라 불리는 승산마을의 효주 허만정(현재 GS그룹 허창수 회장의 조부) 고택 앞에는 연꽃 향연이 한창이고, 300년이 넘었다는 ‘연당못’에는
청개구리와 고추잠자리 한 무리가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지수면 승산길 45번길,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운봉정은 ‘만석꾼’의 집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다. 마당에 들어서자 이정령 여사(72)가 환한 미소로 반겨준다.

지키고 보존해야 할
진주의 이야기

잔디가 잘 가꾸어진 마당을 한 바퀴 휘 돌아보면, 없는 나무가 없다. 은행나무 암그루와 수그루가 마주 보고 서 있고, 오래된 우물가에는 비파나무 열매가 먹음직스럽게 매달려 있다. 부각 재료로 쓰인다는 가죽나무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의 부침으로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도 있다.

마당 한 구석에는 가뭄에도 물이 넘쳤다는 우물이 지금도 건재하다. 그 옛날 장을 담글 때, 술을 담글 때, 김장철 배추를 소금에 절일 때도 요긴하게 쓰였던
우물은 가뭄이 들어 마을 사람들이 애를 태울 때에도 단물이 되어 주곤 했다.

이 계절이 되면
늘 해 먹는 음식

허씨 가문으로 시집 온 지 올해로 50해를 맞이한다는 이정령 여사는
이 계절이 되면 늘 해 먹는 음식이 있다고 했다.

생일상에 빠지지 않고 올린 음식
‘찜국’

모내기가 끝나는 초여름부터 지금 이 계절에 즐겨 먹는 음식이지요.
살이 올라 통통한 논고둥을 잡아 소금물에 담가 진흙을 토하게 한 다음 깨끗하게 손질합니다.
찜국의 육수는 토종닭을 푹 고아 한 김 식힌 후, 기름기와 불순물을 제거해 맑게 준비하고요.

갈무리를 마친 햇토란, 햇연근, 무, 버섯, 당근 등 제철 채소라면 무엇이든 넣어도 됩니다.
토란이 없을 때는 감자를 넣기도 하고요. 채소를 전부 넣고 한소끔 끓이다가
마지막에 쌀과 들깨를 갈아 체에 밭쳐 넣은 뒤 뚜껑을 열고 식히면 완성입니다.
찜국 한 그릇이면 보양식이 필요 없을 정도지요.

찜국 시연을 위해 김이 펄펄 끓어오르는 냄비 앞에서 그녀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찜국은 가마솥에 끓일 정도로 많은 양을 끓여야 재료가 한데 어우러지면서 맛이 더 풍성해지거든요.
그래서 아마 어르신들 생신날이면 꼭 찜국을 올리라 하셨던 것 같아요. 가족이 많기도 했고, 함께 일하던 소작농에게도 한 그릇 나누고 싶다는
숨은 뜻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그 옛날 한여름도 퍽이나 더웠잖아요. 농번기 새참으로도 안성맞춤이고, 땀 흘리는 날이 계속되면 보양식이 필요하기도 했던 시절이었어요.
아버님 생신도 그 즈음이라 ‘생신날 찜국을 올리는 것’이 우리 가문의 전통이 되었죠.
이가 성하지 않은 어르신들에게는 목 넘김이 좋고, 속도 편안해지거든요. 찜국 하나면 별다른 반찬 없이도 밥상이 완성된달까요.

허씨 가문의 찜국은 대를 이어 손끝으로 전해오던 음식이었다. 어떤 재료든 차별 없이 품어 줄 수 있는 넉넉한 성품은 마치 이 집안의 가풍과 닮았다.

모아서 절약하면 천석꾼이 될 수 있지만
만석꾼은 하늘이 낸다

– 사람을 아끼고 나라를 위해 베풀었던 600년의 세월

흉년이 들기라도 하면, 허씨 가문의 정지(부엌)에서는 새벽부터 쌀 한 말로 밥을 지어놓고 날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끼니를 대줄 만큼 인심이 후했다고 한다.
또한 집안의 노비 부부가 아이를 출산하면 귀한 미역과 쌀, 산모와 아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가져다주었다고 할 만큼 이웃에게 정성을 다했다.

옛말에 ‘모아서 절약하면 천석꾼이 될 수 있지만 만석꾼은 하늘이 낸다’ 라는 말이 있다.

허씨 가문이 만석꾼이 된 것은 ‘하늘의 뜻’이라 치더라도,
그 부가 600년이 넘도록 명맥이 유지되었던 것은 재물을 소유하지 않고, 끊임없이 베푼 그들의 미덕 덕분이리라.

지수면 승산마을 허씨 가문의 그 오랜 역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이 시대 ‘참 부자’는 무엇이냐고.

‘혼밥’이 일상이 된 시대, 고독사 뉴스가 대수롭지 않게 된 세상,
우리는 과연 가마솥에 한솥 끓여 낸 걸쭉한 ‘찜국’을 다시 누군가와 나누어 먹을 수 있을까?

진주 허씨
묵동댁 내림음식

김해 허씨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주는 음식 문화를 후대에 알려주기 위해
요리책을 펴냈다

출처: <진주 허씨 묵동댁 내림음식> 비매품

토종닭

콩나물 (200~300g)
우엉 (2뿌리)
토란 (600g)
연근 (1개)
무 (작은 것 1개)
당근 (1개)
양파 (1~2개)
부추 (1/4단)
표고버섯 (3~4개)

대파, 마늘, 논고둥 (적당량)
멥쌀, 들깨
국간장

  1. 손질된 토종닭을 푹 고아 살만 발라 놓는다.
  2. 토란은 적당한 크기로 썬 후 삶아서 물에 담가 놓는다
  3. 콩나물은 머리와 꼬리를 다 떼고 물을 자작하게 붓고 데친다. 이때 콩나물 데친 물은 두었다가 국물에 같이 넣는다.
  4. 우엉은 껍질을 연필 깎듯이 깎아 물에 담가 놓고, 연근도 껍질을 벗기고 5~6mm의 두께로 썰어 물에 담가 놓는다.
  5. 무와 당근은 사방 2.5cm로 나박나박 썰어 둔다.
  6. 부추는 약 5cm 정도 길이로 썰어 둔다.
  7. 양파는 채를 썰고, 대파는 어슷하게 썰고, 마늘은 다져 둔다.
  8. 표고버섯은 얇게 썰어 놓는다.
  9. 불려 놓은 멥쌀과 들깨는 5:5 또는 6:4의 비율로 갈아 체에 받쳐 둔다.
  10. 논고둥은 끓는 물에 데쳐 둔다.
  11. 닭 삶은 물과 콩나물 데친 물을 섞어 불에 올려놓고, 발라 놓은 닭살과 논고둥을 넣어 끓인다.
    끓기 시작하면 표고버섯, 토란, 연근, 우엉, 무, 당근을 넣는다.
    데쳐 놓은 콩나물, 양파를 넣고, 다시 끓으면 국간장으로 간을 하면서 대파와 마늘을 넣는다.
    재료들이 익으면 갈아 놓은 들깨물을 넣고, 다 되면 불을 끈 후 부추를 넣는다.